
어쩌면 들키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책을 덮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어요. 재미있거나 슬펐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들킨 기분이었어요.
오래 전 서랍 깊숙이 밀어 넣어둔 어린 시절의 치부를,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꺼내 내 앞에 펼쳐놓은 것 같은 기분.
김서해 작가의『여름은 고작 계절』은 평범한 10대 소녀의 교우 관계를 다룹니다.
그런데 그 '평범함'이 무섭죠. 친구가 세상의 전부이던 시절, 무리에 끼기 위해 누군가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놓아버릴 수 있었던 그 나이의 마음을, 작가는 미화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1. 『여름은 고작 계절』내용 (스포일러 X)
배경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이 긴 꼬리를 남기며 저물어가던 2000년대다.
열 살 소녀 제니는 부모의 결정으로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낯선 나라, 낯선 언어, 그리고 동양인 여자아이에게 결코 다정하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서,
제니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깎고 마모시켜 '적응'해나간다.
필사적으로 영어를 배우고, 또래 무리를 맴돌며, 겨우 손바닥만 한 자기 자리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균형을 붙들고 있던 어느 여름, 한국에서 이민 온 또 다른 소녀 한나가 나타난다.
한나는 제니와 정반대의 아이다 영어는 서툴지만, 환경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다.
"나는 '해나'가 아니라 '한나'야"라며, 자신의 이름을 편하게 뭉개ㅕㄹ는 또래와 선생님의 발음을 매번 고쳐줄 만큼.
한나는 따돌림을 당한다. 그리고 제니는 그런 한나를 보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동질감, 그리고 잊고 있던 소외의 외로움.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우정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미숙하고 위태로운 마음의 결을 따라 흘러간다.
2. 『여름은 고작 계절』을 읽고 느낀 점
이 소설이 아프게 다가온 이유
이 책의 진짜 주제는 '따돌림'이 아니다. 따돌림당하는 아이를 외면해놓고,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는 이중적인 마음이다.
우리는 대개 가해자와 피해자, 두 얼굴만 기억한다.
하지만 교실에는 그 사이에 낀 수많은 얼굴이 있다.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내 자리가 흔들릴까봐 눈을 돌린 아이들.
외면하면서도 마음 한켠이 계쏙 불편했던 아이들.
작가는 바로 그 회색지대의 마음을, 가장 저급하고 부끄러운 그 감정을 도려내듯 정확한 문장으로 짚어낸다.
읽는 내내 부끄러웠던 건, 그 저급함이 남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손을 놓았던 여름이 있었다.
죄책감은 느꼈지만,
그 죄책감조차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이 소설은 조용이 들춰낸다.
외면은 편했고, 죄책감은 값쌌다. 그 이중성이야말로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우리 자신의 민낯이 아닐까.

3. 기억에 남는 글
그 날들을 떠올리면, 어릴 때 보았던 동화의 한 장면이 함께 떠오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시계 토끼를 쫓아 지하로 굴러떨어진 앨리스가 쿠키 하나를 잘못 주워 먹어서 거인이 된다. 팔다리가 창문에 낀 채로 오도 가도 못 한다. 한 이민자가 꿈을 좇아 미국에 왔다가 바닥도 아니고 지하로 굴러떨어져서는
망상이 산처럼 부풀어 빠져나갈 수 없게 된 것이, 그와 조금 비슷하지 않나?
달콤한 꿈이 염증을 일으키는 바람에 아빠의 과장이 자꾸만 불어나서,
나와 엄마는 집안에서도 자리를 잃곤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도저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내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흐리멍텅한 혼란일 뿐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 것을 특별하고 멋진 일로 포장하곤 하지만, 적어도 내게 사랑은 자신을 조각내어 검열하고 상대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쓰는 일이다. 수많은 단점을 골라내 억지로 감추거나 바꾸느라 자신의 초상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사랑할 때, 나는 가려지고 훼손된다.
..... 그렇다면 사랑은 필연적으로 적응과 비슷해진다. 몸과 마음을 깎고 자신을 변형시키고 새로운 땅에, 모르는 언어에, 미지의 두려움과 아름다움에 공명하는 일, 사랑은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일에는 부스러기가 있으니까. 사건이 끝나도, 시간이 지나도 그것의 부스러기는 계속 굴러가니까. 사건은 애초에 끝이 나질 않으니까. 세상은 지긋지긋하게 연속되고 있으니까.
경계 위에 서야 한다면 서서 버틸 것이고, 나를 위해 누군가를 혼자 두거나 슬퍼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희생시키지 않을 거라고.
가능성을 열어두되 남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나다워져서, 더 나다워진 내가 더 뚜렷한 미래를 만지게 하고 싶다고.
마지막 글귀가 아마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니가 제니다워지기를, 세상 밖으로 나와서 무엇이든 손에 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쓴 것 같아요.
4.『여름은 고작 계절』은 실화?
소설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작가님은 한나였네요. 그러면서 제니로 자랐습니다.
어디까지가 실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민자로서 겪었던 그 지난한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감히 가늠도 안됩니다.
낯선 곳에서 치열하게 버텨야 했던 여린 시절에 위로를 보내며,
다들 힘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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